매일 꿈이 있는 공간

  •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서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 1592년 조선 수군이 승리한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에서는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여 크고 작은 총통들을 쏘아대어 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고 한다.[6]
  • 1595년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7] 거북선은 판옥선이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 1606년(선조 39년)에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하여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만든 창선을 만들었는데 격군 42명이 저었으며 판옥선보다 훨씬 빨랐다.
  • 1622년에는 광해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재정비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 1687년에는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드는 것과 임진왜란 때와 가능한 같이 만들어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영의정 김수항이 건의했다.
  • 1735년에는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더불어 거북선을 개조하였는데 이 때는 3층 구조의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뽀족하여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때 그 모형을 내전에 가지고와 선보였다고 한다.
  • 또한 1751년의 기록에는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이 개조할 때마다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으나 그 때는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6]
  • 1808년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묻고 이당이 대답하기를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다닐 때는 마치 거북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6]
  • 1867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 1990년 10월에는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개조 사업의 일원과 더불어 호국정신 계승과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t 규모로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건조, 한강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였다. 기존 거북선 사양과 비슷하나, 안에 창문을 달고 겉에는 가짜 대포를 위한 나무틀(낙창식 창문처럼 열 수는 없다.)을 단 것과 시속 15~20km로 달릴 수 있는 모터가 설치된 점이 다르다. 이것은 이촌동 거북선나루에서 지난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어 있었다가, 장소를 옮기고 민물에서 바닷물 전용으로 개조되어 현재 통영에서 전시하고 있다.



'히스토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분위기  (0) 2018.11.24
택배의 역사  (0) 2018.11.22
을사늑약의 내용에는...  (0) 2018.11.22
스모킹 건의 뜻은?   (0) 2018.11.22
노래방의 역사..시작은 부산에서?  (0) 2018.11.21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