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꿈이 있는 공간

1926년 8월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이 쓰시마섬 옆의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바다를 지나고 있었을때

소동이 벌어진다

 

 

두명의 조선인 남녀가 실종된 것이다.

여자는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 남자는 극작가 김우진, 두 사람은 불륜관계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실종은 ‘현해탄 위의 정사(情死)’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기사화 된다

 

미성의 주인 윤심덕양 청년문사와 투신정사”라는 제하에 같은 내용의 기사가 같은 날짜 사회면 머리기사로 조선일보에도 실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죽기 직전 윤심덕의 심정이 담겨있다는 한 장의 레코드가 발매된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가 바로 그 곡이다.

 

사의 찬미(死의 讚美)

 

1절

矌寞광막 荒野황야에 달니는 人生인생
너의 가는곳 그어대냐
쓸々한 世上세상  險惡험악苦海고해
너는 무엇을 차즈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된 이世上세상
나죽으면 고만일ㅅ가
幸福행복찻는 人生인생들아
너찻는 것 서름

2절

웃는져ᄭᅩᆺ과 우는져새들이
運命운명이 모도다 갓흐니
 熱中녈즁 可憐갈련 人生인생
너는 칼우에 춤추는로다

3절

虛榮허영에 ᄲᅡ져 날ᄯᅱ는人生인생
너 속혓슴을 네가아느냐
世上세생의것은 너의게 虛無허무
너죽은후에 모도다업도다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대중가수로 1920년대 신여성의 대표인물이다.

김우진은 신극운동을 하던 전라도 거부의 아들이었다.

 

 

윤심덕(왼쪽)과 김우진(오른쪽)


 

평양 출신의 윤심덕은 가난하지만 기독교 신자인 부모 덕에 신식교육을 받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성이 뛰어났던 그는 일본 총독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음악학교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됐다.

1921년 윤심덕은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만든 순례극단 동우회에 들어가면서 김우진을 만난다.

당시 김우진은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둘은 조선에서 두 달여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여러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정통 서양 성악으로는 곤궁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고, 연극단체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를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윤심덕은 ‘함경도 출신 재력가와 결혼한다’ ‘장안 거부의 애첩이 됐다’ 등 각종 스캔들에 시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고민하다

 1926년 가출해 일본으로 가고 만다.

윤심덕도 그 해 7월 일본 오사카의 닛토레코드회사에서 음반 취입 의뢰를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

윤심덕은 레코드 취입을 마친 8월1일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서양 노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곡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것으로 제목은 ‘사의 찬미’였다.

앞서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라는 전보를 보냈다.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둘은 결국 다시 만났고 8월3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함께 올랐다.

윤심덕이 남긴 마지막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려, 당시로는 경이로운 10만장 판매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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